어느 시대나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위대해 보이지만, 진짜 마음의 감동을 주는 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 사람입니다.
그 처절한 회복의 시간을 견딘 이들의 이야기가, 지금의 우리에겐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죠.
우리가 아는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쓴 실학자, 개혁가, 위대한 학자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억울하게 죄인이 되어 고향을 떠났고, 막내 아들의 부고를 듣고도 눈물조차 삼켜야 했던 아버지였습니다.
정약용은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글을 썼고, 사람을 생각했고, 스스로를 붙잡았습니다.
이 시리즈는 그의 업적보다도, 그가 어떻게 고독을 견디고 다시 자신을 일으켰는지를 보여줍니다.
정약용을 다시 쓴다는 건, 한 시대의 사상가를 인간으로 마주하는 일이자, 오늘의 우리 자신을 다시 써 내려가는 성장의 연습이기도 합니다.
살다 보면 누군가는 늘 무너진다.
뜻하지 않은 일로 삶이 꺾이고, 가까웠던 사람에게 등돌림 당하고,
지켜야 할 자리를 빼앗기듯 내려오게 되는 날이 있다.
그럴 땐 누군가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오래 버티며 스스로를 다시 꿰매야 한다.
조선의 한 사람도 그랬다. 정약용, 그는 무너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다.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된 건 1801년(순조 1년, 정약용은 천주교 관련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강진으로 유배됨),
정조가 죽고 난 후 실각한 남인계 인물로 몰렸기 때문이다.
정조는 그를 아꼈다. 규장각 관원, 자문관, 정책 실무자로 발탁해 개혁의 중심에 세웠다.
그러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조정은 급속히 보수화됐다.
천주교 박해가 본격화되며, 정약용 역시 '신유박해'의 한가운데 휩쓸렸다.
그는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강진으로 귀양을 갔고,
부인과 자식들과도 헤어져야 했다.
한순간에 사람이 사라지고, 직책이 사라지고, 자신의 쓸모도 사라졌다.
유배지에서 정약용은 막내아들 농아의 부고를 접한다.
아이를 직접 보낼 수조차 없는 상황. 장례도,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시기, 다산의 심정을 다음으로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나는 목숨을 부지했으니, 이 또한 하늘이 버리지 않음이다.”
(해석적 인용 : 이 문장은 아들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지만, 동일한 시기 시문집에 정리된 감정을 풀이함 것임.)
슬픔 앞에서 무너졌지만, 그는 그 감정을 그대로 글 속에 눌러 담았다.
세상을 다시 품기 위한 예열처럼 말이다.
강진에서 정약용은 쓰고 또 썼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아방강역고...
그의 대부분의 책들은 강진 유배 18년 동안 쓰였다.
(정약용의 저작 대부분은 1801~1818 강진 유배 시기 집필. (『여유당전서』 참고)
그 글들은 제도를 말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읽으면 삶을 회복하는 그의 마음의 구조도 함께 담겨 있다.
그에게 글쓰기는 자아의 정리이자,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우리는 살아가며 ‘무언가를 고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몸을 고치고, 관계를 고치고, 때로는 마음을 고친다.
정약용은 물리적 회복보다 도덕적 회복을 중시했다.
자신의 마음을 “고쳐 쓴다”라고 표현했고,
그것이 바로 그가 정약용이라는 한 사람을 다시 세운 방식이었다.
혹시 지금,
우리도 때때로 어느 마음의 유배지에 있진 않은가?
사람들과 멀어지고,
사람들 속에서도 외로워지고,
스스로가 불필요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그 시간.
그럴 때, 정약용은 글을 썼다.
그는 신념보다 감정을 먼저 추슬렀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어쩌면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너지는 줄도 몰랐던 그날들 – 기후가 삼킨 문명의 기억 (2) | 2025.06.19 |
---|---|
세종의 실패는 무엇이었나 – 성공만 조명된 세종의 실수들.. (3) | 2025.06.12 |
얼짱이 조선에도? – 미의 기준, 시대를 건너다 (0) | 2025.06.03 |
가짜뉴스는 역사에도 있었다 – 조선과 대한제국 시대의 루머 (1) | 2025.05.28 |
시대를 바꾼 1인 미디어 - 일기, 비망록의 힘.. (1) | 2025.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