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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그들도 그만두고 싶었다 – 조선의 사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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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쳐 떠났던 조선의 선비들. 그들의 사직서엔 지금 우리와 닮은 마음이 적혀 있었습니다.

썸네일 이미지 : 퇴사를 고민하는 조선의 선비

시대는 달라도, 그 마음은 같았다

이 질문은 얼핏 보면 장난처럼 들릴 수 있다. 조선은 '왕이 시키는 대로' 사는 시대 아니었나? 하지만 의외로 조선의 공직사회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일을 계속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안고 살았다. 단순히 권위에 눌린 것이 아니라, 조선의 관리들도 명예, 양심, 생계, 정치적 갈등 등의 이유로 직을 거절하거나 사직서를 제출했다.

 

놀랍게도 '퇴사'는 조선에도 분명히 존재했던 현상이었다. 조선시대의 퇴사는 주로 세 가지 이유로 나타난다. 첫째, ‘자진 사직’, 즉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는 형태다. 둘째, ‘사면초가형 퇴사’, 정치적 압력이나 외부 공격에 의해 떠밀리듯 그만두는 경우다. 셋째, ‘은퇴와 귀향’, 일정 나이나 상황에 따라 스스로 물러나는 모습이다. 이 모든 상황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직장생활의 풍경과 은근히 닮아 있다.

 

 

율곡 이이, 떠남을 선택한 관료

실제로 율곡 이이는 13번 벼슬에 나아가고, 10번 이상을 자청해 물러났다고 전해진다. 『율곡집』 등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정치적 모략, 학문적 소명, 상황에 대한 환멸 등을 이유로 자진 사직을 반복했다. “벼슬이란 것은 도를 펴기 위한 도구일 뿐,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그의 말은 당시에도 지금에도 경외감을 준다.

이이는 퇴사를 단지 회피가 아닌 ‘선택과 결단’으로 보았다. 그는 현실정치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떠났고, 그 떠남 속에서 학문적 완성에 몰입했다. 직장이 자신의 인격을 훼손한다고 느꼈을 때, 그는 기꺼이 사직서를 꺼냈다.

 

 

퇴계 이황, 관직보다 고요를 택하다

또 다른 예는 퇴계 이황이다. 『퇴계문집』에 기록에 따르면 그는 벼슬에서 물러날 때마다 상소문을 올려 사직 사유를 밝혔다. 특히 1545년(명종 즉위년), 외척 정치의 격랑 속에서 “시국이 혼탁하고, 신이 도를 행할 길이 없다”는 표현을 써가며 물러났다. 퇴계는 직위가 인간을 어지럽힌다고 보았고, 학문을 위해 조용한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

이황의 사직에는 자신의 내면에서 말하는 소리가 담겨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고민하는 ‘일과 삶의 균형’ 문제와도 닮아 있다.

 

 

'퇴사'란 단어는 없었지만, 이 감정은 있었다

물론 ‘퇴사’라는 현대적 단어가 당시 문헌에는 없다. 하지만 관리들의 편지를 살펴보면 “더는 마음을 다하지 못하겠다”, “과분한 자리에 부끄럽다”, “몸과 마음이 상하여 벼슬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단순히 병이나 정치적 이유를 넘어, 내면의 고민과 좌절, 훗날의 자기 존재에 대한 고민이 퇴사의 감정적 동기였음을 보여준다.

퇴사의 감정은 시대를 초월한다. 눈치를 보고,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불안해하거나, ‘지금 이 길이 맞는가’를 자문하는 감정은 조선에도,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떠남'은 자기 존중이었다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했던 날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가?... 버텨야만 할 것 같은 조직,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 감당해야 할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마음을 붙잡는다. 하지만 때로는 그 모든 걸 넘어서, 나 자신에게 진실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있다.

율곡과 퇴계는 그 순간을 ‘물러남’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떠남은 패배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존중의 선언이었다. 이들은 남아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떠났다. 오늘의 우리는 그와 반대로, 너무 오래 견디느라 마음이 상해버리곤 한다.

 

 

떠남은 때때로, 가장 정직한 선택이다

요즘은 퇴사를 말하기가 더 어렵다. 어려운 경제 상황, 이직 시장의 침체, 더 나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소심해지는 마음이 퇴사 자체를 ‘패배’로 오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조선의 당당한 퇴사자들은 퇴사를 ‘패배’가 아니라 ‘선택’으로 여겼다. 이러한 떠남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기 계발과 자아발견의 과정이었다.

조선의 사직서에 비추어 보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나은 연봉보다도, 더 나은 관계보다도, ‘떠날 수 있다는 확신’ 아닐까.

마치 율곡 이이처럼 말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감당할 수 없기에, 떠나는 것이 맞다.”
“지금 내 마음에 외침은, 여기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건 조선에서도, 지금도, 충분히 당당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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